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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회■ | 서인식 | 2026-03-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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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회...]
한국 교회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그런데 그 '부흥'이 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이야기하는 곳을 많이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부흥은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이거나, 헌금이 많아지는 것이거나, 집회에 사람이 가득 차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그게 정말 부흥이라면, 연일 셀 수도 없이 많은 부흥회가 열리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들은 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성경과 역사 속에서 개혁주의 신앙이 '부흥'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쓴다.
1. 부흥과 교회의 외형적 팽창은 다르다
먼저 개념을 정확히 정리해야 한다.
부흥과 교회의 외형적 팽창은 같은 말이 아니다. 교회의 외형적 팽창은 측정할 수 있다.
등록 교인 수, 헌금 액수, 예배당 규모, 숫자로 나온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이것을 부흥의 증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부흥을 영어로 리바이벌(Revival)이다.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다. 죽어있거나 죽어가는 무언가가 전제이지 교회 건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형식만 남은 신앙 안에서 굳어가던 성도들의 심령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들 중 상당수는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모인다.
그렇다면 그곳은 부흥한 교회일까요? 그런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숫자는 부흥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숫자에 눈이 멀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서 하게 된다.
죄를 죄라고 부르지 못하게 된다.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이다.
단 한 명의 심령이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진정 새로워진다면, 그것이 부흥의 시작인 것이다.
2.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이 이해한 부흥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임하셔서, 이미 구원받았으나 죄 안에서 무뎌지고 냉랭해진 성도들이 다시 깨어나는 역사, 동시에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이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즉, 부흥은 성도의 내면 갱신만도 아니고, 불신자의 회심만도 아니다.
둘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록을 보면,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새로워지는 동시에 하루에 수백 명씩 회심하는 역사가 함께 일어났다.
성도의 갱신과 불신자의 구원을 분리하는 것은 성경적 부흥 이해를 반쪽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흥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기획할 수 없고, 프로그램으로 제조할 수 없다. 성령께서 임하시기로 작정하실 때 일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그런데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부흥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12:13)
부흥 때 성도가 경험하는 것은 성령세례의 반복이 아니다.
이미 내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이 새롭게 임하는 것이므로 이 둘은 다르다.
3. 참된 부흥이 임할 때 반드시 있는 것들
역사 속 참된 부흥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말씀이 살아 움직였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이 아니라, 죄를 죄라고 부르는 말씀이 선포되었다.
에드워즈의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은 지옥 협박이 아니었다.
죄의 무게와 그리스도 은혜의 긴박함을 동시에 선포한 복음 설교였다.
그 설교가 선포될 때 회중이 의자를 붙잡고 통곡했다.
오늘날 강단에서 그런 말씀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상처 치유, 심리적 위로, 성공과 번영, 듣기 좋은 말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부흥은 그런 자리에서 오지 않는다.
둘째,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일어났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기억해야 한다.
그 부흥의 핵심은 집회의 열기가 아니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삶이 바뀐 것이다.
그 바뀐 삶을 본 불신자들이 복음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셋째, 기도가 먼저였다.
오순절 이전 성도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했다(행1:14). 부흥은 언제나 기도하는 무릎 위에서 시작되었다.
프로그램 이전에 기도가 먼저였다.
4. 부흥은 인간이 설계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특정 집회, 특정 설교자, 특정 프로그램으로 기획해서 부흥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들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인위적으로 감정을 크게 자극하는 음악, 쓰러지고 넘어지고 방언하고 예언하는 현상,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결단을 강요하는 집회 방식, 그것이 통하면 이런 현상을 부흥이라고 부른다.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는 올바른 방법을 쓰면 부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주권을 인간의 기술과 방법으로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실하게 말씀을 선포하고, 죄 앞에서 눈을 감지 않으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더 큰 집회가 아니다. 더 화려한 프로그램도 아니다.
강단에서 다시 복음이 선포되는 것, 목사와 성도가 함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 그것이 먼저인 것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러나 신실함은 우리의 무릎과 기도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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